2022년 4월 27일 수요일

[벌거벗은 세계사] 인디언들의 피, 눈물 위에 세워진 미국 서부 개척의 역사


1776년 대서양 연안을 중심으로 한 13개 주가 모여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포하며 시작된 미국의 역사는 끊임없는 개척의 역사이기도 했다. 대서양 연안에서 미국은 점점 서쪽으로 그 영토를 확장했고 마침내 태평 연안에 이르렀다. 이후 미국은 북극권의 알래스카와 태평양의 섬 하와이까지 그들 영토에 포함하면서 미국 국기 속 별 개수와 같은 50개 주로 이루지는 광대한 영토의 미합중국을 이뤄냈고 세계 최강국이 됐다.


이런 영토 확장의 역사에서 많이 나오는 말이 개척정신, 프런티어 정신이다. 새로운 땅을 찾아 그 땅을 개척하는 건 건국 이후 미국인들에게는 일종의 사명이었다. 과거 청교도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 미 개척지인 미국 동부 해안에 터전을 잡은 이후 미국은 신대륙에서 그 영역을 넓히고 고도의 민주주의 체제를 갖춘 나라로 성장했다.

하지만 이런 미국의 영광스러운 역사 이면에는 오랜 세월 미국에서 터전을 잡고 살아온 원주민, 인디언들 고난의 역사가 함께 하고 있다. 이들은 분명 그 땅의 주인이었지만, 미국인들에게 그들은 미개한 존재들이었고 존중받지 못했다. 미국인들이 정착 초기 어려움을 겪을 때 인디언들은 그들에게 농사 방법을 알리고 기아에서 벗어나도록 도움을 줬다. 그들의 도움으로 첫 수확을 한 미국인들이 그 기쁨을 나누기 위해 만든 게  추수감사절이었다.

하지만, 신대륙을 다수의 유럽인들이 밀려들면서 인디언들은 점점 그들을 영역을 잃었다. 서부 개척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인디언들은 점점 그들의 땅에서 밀려 더 척박한 땅으로 터전을 옮겨야 했다. 그 과정에서 탄압을 받으며 큰 희생을 겪기도 했다. 미국이 말하는 미개척지는 사실 인디언들의 땅이었고 미국인들은 그 땅을 주인을 몰아낸 셈이었다. 미국의 개척시대는 명암이 공존했다. 









미국 서부 개척시대의 문을 연 도시가 있다. 미국 남부 미시시피강 하구의 도시 뉴올리언스가 그곳이다. 유럽풍 건물들이 여전히 곳곳에 존재하고 재즈의 본고장이기도 한 뉴올리언스는 미국 독립 당시 프랑스 영역에 속해있었다. 1783년 파리 강화조약을 통해 국제적으로 독립은 인정받은 미국은 기존 13개 주 외에 미시시피강 동쪽의 영토도 추가로 확보했다. 그 서편 루이지애나 지역은 프랑스와 스페인의 영역 다툼이 치열했다. 뉴올리언스는 프랑스 세력권에 있었지만, 스페인의 통제를 받기도 했다. 이런 복잡한 상황은 스페인과 미국의 분쟁을 불러왔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3대 대통령 제퍼슨이 과감한 결정을 했다. 제퍼슨은 미시시피강 서편 루이지애나 지역의 매입을 추진했다. 당시 그 지역은 미국 중부에 이르는 광활할 면적이었다. 그 땅의 매입은 상당한 자금이 필요했다. 미국 내 반발도 상당했다. 하지만 제퍼슨은 영토의 확장을 자유의 확장으로 규정했다. 이를 통해 가난한 이들이 새로운 땅을 가질 기회를 제공했다. 재산이 권리이고 참정권의 원천이기도 했던 시대에 제퍼슨의 주장은 대중의 지지를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1803년 미국은 프랑스와의 협상 끝에 1,500만 달러 지금 가치로 175억 원 정도에 루이지애나 지역의 영토를 매입하는 데 성공했다. 루이지애나는 현재 미국 50개 주 중 한 곳이지만, 당시 그 넓이는 한반도 면적의 10배에 이르렀다. 그 지역을 확보한 미국의 영토는 두 배로 확장됐다. 이로 인해 인해 미국인 농수산물의 중요한 이동통로인 미시시피강 유역을 완벽하게 그들의 영역으로 포함할 수 있었고 본격적인 서부 개척 시대의 문을 열 수 있었다. 

미국에 루이지애나 지역을 매각한 프랑스는 당시 나폴레옹의 통치 시기였다. 나폴레옹은 유럽의 패권을 놓고 영국에 대결 중이었고 카리브해 연안의 식민지 아이티의 반란 진압 등 여러 현안이 산적해 있었다. 계속된 전쟁으로 막대한 전비가 지출되고 국가 재정에서 어려움이 커지는 상황이었다. 미국 내 영토 관리에 어려움이 생긴 프랑스는 미국과의 협상에 임했고 매각을 결정했다. 프랑스의 결정은 미국으로서는 역사상 최고의 거래를 이끌었다.








한 번 물꼬를 튼 미국의 영토 확장은 그 속도를 더했다. 1821년 스페인으로부터 지금의 플로리다 지역을 넘겨받으면서 미국은 지금의 동부지역 전체를 그들 영토로 편입했다. 이는 해당 지역에 살고 있는 인디언들과의 갈등을 불러왔다. 오랜 세월 그 땅에 터 잡아 살고 있던 인디언들은 자연과 함께 더불어 사는 삶을 살았다. 새로운 땅의 개척과 개발을 중시하는 미국인들과 가치관 차이가 명확했고 이는 공존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었다. 또한, 미국 지도자들의 인디언에 대한 차별 정책은 갈등을 더 크게 했다. 

1830년 미국 대통령 앤드루 잭슨은 인디언 추방법을 만들었다. 이는 그들을 열등한 민족으로 규정하는 한편 미국의 필요에 의해 강제 이주를 가능토록 했다. 중요한 대상은 체로키족이었다. 당시로는 서부 플로리다 조지아주에 살던 그들은 일찍부터 서구문물을 받아들이고 미국 사회에 동화되어 살고 있었다. 인디언 부족 중 유일하게 그들만의 문자를 가지고 있었고 대학교를 설립하는 등 문명화의 길을 걷고 있었다. 

하지만 1829년 그 지역에 금이 발견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금광 개발을 위해 체로키족은 부족 전체가 미국 중부 오클라호마주 지역으로 강제 이주를 당했다. 1,900여 킬로에 이르는 먼 이동거리였고 이동 수단도 마땅치 않았다. 그들에게 제공되는 식량도 형편없었다. 체로키족 대부분은 도보로 이동해야 했다. 먼 거리에 추운 날씨가 겹치며 4,000여 명의 인디언들이 폐렴, 저체온증, 영양실조 등으로 사망했다. 이들은 사망자를 이동로 한편에 묻고 그들의 가슴에 묻고 길을 나서야 했다. 수많은 희생자를 남기고 체로키족은 척박한 환경의 새 정착지로 이동했다. 그들의 이런 행로는 눈물의 길 불리게 된다. 이동 과정의 참사는 당시 호송을 담당했던 미군의 수기에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런 미국의 서부로의 확장은 멕시코 영토로 확대됐고 당시 멕시코 영토였던 텍사스가 양국 이해관계 충돌의 장소가 됐다.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멕시코는 광활한 면적의 텍사스 지역의 관리를 위해 미국인들 이민을 대거 허용했다. 이는 미국의 텍사스 지역에 대한 영향력 확대로 이어졌고 급기야 텍사스는 텍사스 공화국으로 독립 선언으로 발전했다.









멕시코는 무력으로 이를 제압하려 했고 이는 텍사스 독립전쟁으로 확대됐다. 미국의 지원을 받은 텍사스 공화국은 이 전쟁에서 승리했고 멕시코의 대통령이 미국의 포로가 되는 일이 발생했다. 결국, 텍사스는 멕시코로부터 독립을 얻어냈고 1845년 연방으로 편입됐다. 훗날 텍사스는 대규모 유전이 발견됐고 이는 미국 경제발전에 큰 힘이 됐다. 멕시코에는 원통한 일이었지만, 미국에는 큰 승리의 역사였다. 그 사이 1846년에는 태평양과 맞닿은 미국 북서부 지역이 감리교 등 종교인들의 개척을 통해 오리건주로 미국에 편입됐다. 

미국의 시선은 다시 태평양 연안의 캘리포니아로 향했다. 이에 반발하는 멕시코와의 전쟁 끝에 미국이 승리하면서 1848년 2월 양국의 평화협정이 체결됐고 미국인 캘리포니아마저 그들의 영토에 포함했다. 미국은 캘리포니아 남부지역을 추가로 확보하면서 태평양 연안 일대에 이르는 영토를 확정했다.

1867년에는 러시아와 인접한 북극권의 알래스카를 러시아로부터 매입했다. 이를 두고 연중 눈으로 뒤덮은 쓸모없는 땅에 대한 매입에 비판 여론이 강하게 일어났지만, 태평양으로 영역 확대 등을 명분으로 매입이 실현됐다. 이후 알래스카 지역은 구 소련과의 냉전시대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가 됐고 석유 등 천연자원이 발견되면서 미국에 큰 이익을 주는 지역이 됐다. 이에 더해 미국인 독립왕국이었던 하와이마저 편입하면서 태평양 지역으로도 영토를 확장했다. 

이렇게 넓은 영토를 확보한 미국이었지만, 여전히 그들의 경제, 문화의 중심은 동부 대서양 일대였다. 인구나 각종 경제적 수준이니 삶의 여건이 서부는 동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했다. 서부지역 개발을 위한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당장은 다수의 인구가 그 지역으로 유입돼야 했다. 








동. 서부의 불균형을 해결할 수 있는 계기는 뜻하지 않은 곳에서 마련됐다. 1848년 캘리포니아 지역에 금이 발견됐다. 골드러시의 시작이었다. 미국 정부는 이를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미국 서부 지역은 금세 새로운 기회의 땅으로 인식됐다. 미국인들뿐만 아니라 급속히 유입되던 다수의 이민자들도 서부로 몰려들었다. 동부에서 캘리포니아로 향하는 여정은 죽음의 사막이라 불리는 사막지대를 지나는 험난한 길이었지만, 꿈을 찾아오는 이들이 의지를 막을 수 없었다. 이는 캘리포니아 지역의 급속한 인구 증가로 연결됐다.

미국의 유명 미식축구팀 샌프란시스코 49ers의 49는 골드러시 당시 최초로 캘리포니아 지역에 정착한 이들을 상징한다. 미국을 상징하는 청바지는 혹독한 환경의 금광 등에서 일하는 이들에 맞는 작업복을 만드는 과정에서 등장한 옷으로 이후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게 됐다. 또한, 늘어난 인구로 인해 취약해진 치안의 안정을 위해 등장한 보안관 또한 미국 서부 개척 시대를 상징하는 또 하나의 아이콘이 됐다. 미국 서부는 시간이 흐를수록 민주주의 시스템의 정착과 함께 동부지역과 다른 문화적 전통을 만들어 갔다. 

이렇게 부푼 꿈을 안고 많은 이들이 골드러시의 흐름 속으로 들어왔지만, 금을 발견하고 부와 명예를 거머진 이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골드러시의 열기도 점점 식어갔다. 하지만 대규모로 유입된 인구는 지역의 상업 발전과 함께 도시화로 이어지며 자생력을 갖추게 했다. 남북 전쟁 이후 링컨 대통령이 시작한 미국 동. 서부를 잇는 대륙 간 횡단 철도의 건설과 개통은 인적 물적 교류를 활발하게 했고 경제 부흥에 긍정적인 영향을 줬다. 미국 서부지역은 각종 인프라가 확충되며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이런 서부 개척은 인디언들에게 또다시 시련으로 다가왔다. 철도 건설 부지 상당수는 인디언들이 머물던 보호구역에 속해있었다. 이미 그들의 터전을 잃고 미국 중부지역으로 이주한 인디언들은 또다시 삶의 터전을 잃을 위기에 몰렸다. 여기에 인디언들 삶에 있어 중요한 원천인 버팔로에 대한 대규모 정리 작업이 병행되면서 인디언들은 더 벼랑 끝으로 몰렸다. 철도 건설과 관리에 어려움을 주는 버펄로 무리에 대해 미국 정부는 대규모 사냥을 허용했고 수백만 마리가 희생됐다. 버펄로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 인디언들에게 식량과 의복들을 제공하는 수단이었다. 이런 상황은 인디언들의 반발을 불러왔고 그들의 무장봉기로 이어졌다. 









곳곳에서 인디언들과 미국인들과의 충돌이 생겼다. 대표적으로 1876년 일어난 리틀빅혼 전투는 인디언 부족 연합과 미 정규군 간의 전면전이었다. 이 전투에서 인디언들은 미군에 큰 승리를 거뒀다. 미국의 대표적 장군인 커스터 장군이 전사하기도 했다. 이 전투는 인디언들의 투쟁사에서 가장 큰 승리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인디언들은 오랜 기간 무장투쟁을 이어갈 수 없었다. 각종 물자가 부족했고 식량 문제도 심각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인디언들의 항복 인원이 늘었고 인디언 군대를 와해됐다. 지도부 상당수도 미군에 희생됐고 흩어졌다. 인디언들의 무장 투쟁은 한계에 봉착했고 인디언들의 미국 정부의 의도대로 또다시 다른 보호구역으로 이주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미군의 인디언들에 대한 대규모 학살이 자행되기도 했다. 1890년 12월 인디언 보호구역 내에서 미군에 의해 200여 명의 인디언 주민들이 살해당한 운디드니 학살이 대표적 사건이었다. 이 밖에도 미군에 의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인디언들을 학살하는 일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이런 피의 역사와 함께 1890년 미국은 더 이상의 추가 정착지가 없음을 선언했다. 미국 개척시대가 끝났음을 의미하는 일이었다. 개척의 역사는 그렇게 공식적으로 종료됐지만, 그 정신과 영향력을 지금도 미국 사회 곳곳에 남아있다. 챙이 넓은 일명 카우보이모자는 미국을 상징하고 있다. 카우보이는 애초 소를 모는 이들이었고 흑인들과 멕시코인 등 하층민들의 그 일을 했다. 하지만 이후 카우보이 캐릭터는 미국 서부 개척시대를 상징하는 인물과 방송과 영화, 드라마 등에서 각색되고 다뤄지며 미국의 개척정신을 상징하고 있다.








다른 측면으로서는 19세기 후반 산업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서부 개척의 정신이 희미해지고 고전적 가치마저 흔들리는 상황에서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문화적 흐름으로 이를 해석하기도 했다. 현재까지도 카우보이는 미국인들 사이에서 즐겨 애용되는 캐릭터다. 그만큼 미국 개척시대는 미국인들에게 강한 자부심과 긍정의 역사로 남아있다. 이를 통해 미국은 사회적 불만을 해소하고 다수의 인종이 공존하는 다민족 국가로서 강대국으로 발전하는 터전을 마련할 수 있었다. 미국 번영에 있어 서부 개척사는 결코 빼놓을 수 없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서부 개척의 역사는 누군가의 피와 눈물을 수반하고 있다. 인디언들은 서부 개척 역사에서 철저히 소외되고 필요 없는 존재로 탄압받았다. 백인들의 탐욕과 정복욕에 인디언들은 무참히 희생됐다. 그들의 터전을 지키려는 노력과 저항은 철저히 악마화됐다. 미국은 정의로운 존재 인디언들은 그들을 막는 악당이었다. 어쩌면 인디언들의 비극은 백인들의 인종주의의 산물일 수도 있다. 

그렇게 보호구역으로 들어간 인디언들은 지금도 궁핍한 생활을 면치 못하고 있다. 상당수가 범죄와 마약 등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 이들의 이런 삶은 서부 개척 역사의 어두운 일면이다. 최근 미국 정부는 서부 개척 시대 당시 인디언들에게 자행된 각종 탄압과 학살 등에 대해 사과 메시지를 남기기도 했지만, 그들의 원통함이 사라진 건 아니다.

무엇보다 오랜 세월 이어진 그들의 전통과 문화가 파괴되고 정체성마저 부정되는 현실이 그들에게는 더 큰 고통이 될 수 있다. 이는 인종의 용광로이자 다양성이 공존하는 다민족 국가의 모범이라 할 수 있는 미국의 국가적 정체성과도 맞지 않는 일이다. 지금이라도 서부 개척 시대의 명암을 함께 밝히고 이를 알리고 잘못된 것을 반성하는 성숙한 역사 인식이 필요하다. 



사진 : 프로그램/픽사베이, 글 : jihuni74

2022년 4월 25일 월요일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167회] 전북 내륙 청정 동네 임실군에서 행복 만들어가는 사람들

 

전라북도 임실군은 전북의 중앙부에 자리하고 있어 사면이 전라북도의 다른 시군과 경계를 접하고 있다. 이 때문에 임실군은 산지가 많고 섬진강의 상류를 품고 있다. 멋진 산세와 자연 풍경을 가지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전형적인 전원의 풍경은 임실군을 대표하는 모습이다.


임실군과 정읍시 경계에 건설된 섬진강댐으로 인해 만들어진 인공 호수 옥정호는 지역을 대표하는 명소이기도 하다. 또한, 임실치즈는 지역의 대표 브랜드로 큰 인지도를 가지고 있다. 도시 기행 프로그램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167회에서는 봄 색깔이 짙어지는 임실군을 찾아 지역의 명소와 이웃들의 삶을 함께 살피며 이야기를 들었다. 

이른 아침 임실의 명소 옥정호를 찾았다. 운무가 낀 호수의 모습은 신비로우면서도 장엄한 느낌이었다. 옥정호는 사시사철 멋진 풍경을 보여주는 곳으로 사진가들에게는 대표적인 사진 명소이기도 하다. 특히, 운무가 함께 하는 새벽의 옥정호는 사진가들이라면 한 번쯤 담고 싶어 하는 풍경이다. 이날도 운무로 덮인 옥정호의 모습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운무가 걷혀가는 풍경도 또 다른 장관이었다. 


임실군의 명소를 지나 어느 한적한 마을로 향했다. 골목길 한편에 국수를 널어 말리는 집이 있었다. 그 집에는 세월의 흔적 가득한 국수 공장이 있었고 노부부가 작업에 한창이었다. 부부는 50여 년 동안 국수를 만들고 공장을 운영했다고 했다.


이 집은 이 부부의 인생 대부분을 함께 한 국수공장이자 삶의 터전이었다. 이 공장의 국수는 국수를 뽑아 자연 건조하는 방식을 유지하고 있었다. 옥상 한편에 마련된 건조장을 오가는 발걸음이 세월의 흐름 속에 얼마나 많았는지, 계단이 닳아 있었다. 부부는 수십 년의 세월 한결같이 국수를 만들고 말리며 계단을 오르내렸다. 이제 부부는 자식들도 장성했고 삶의 여유가 생겼지만, 국수 만드는 일을 놓을 수 없다. 그들에게 힘들고 고단한 삶을 안겨준 국수 공장이지만, 삶의 지탱하는 힘이 국수공장이었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지만, 부부의 마음 한편에는 후회가 남아있다. 국수 공장을  하면서 일에 치여 살면서 자식들에게 따뜻하고 자애로운 부모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조금이라도 사랑하는 마음을 더 표현하고 자식들에게 잘해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마음 가득 남아있다. 하지만, 그때의 기억이 행복한 추억이 됐다. 자식들,  그리고 자식들이 낳은 손주들과 사진은 부부가 힘을 네게 하는 에너지가 되고 있었다. 부부의 국수 공장은 그렇게 다시 힘차게 또 다른 내일을 위해 국수를 뽑아내고 있었다. 


임실군의 전통시장을 찾았다. 장날이 아닌 탓에 인적이 많지 않았지만, 오랜 연륜이 느껴지는 시장의 분위기였다. 그 시장의 역사를 품고 있는 순대 식당에 들렀다. 흔히, 피순대라고 하는 순대로 순댓국을 내어주는 이 식당은 3대를 이어온 말 그대로 뼈대 있는 노포였다.


지금은 26년 차 중년 부부가 가업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부부는 20대 초반의 어린 나이에 부부의 연을 맺고 식당 일을 시작했다. 풋풋한 20대 젊은 부부는 어느덧 40대 중반의 나이가 됐다. 그 사이 식당도 나이를 먹었고 자녀들도 장성했다. 고단하고 힘든 식당일이 반복됐지만, 부부는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켰고 식당의 역사도 이어졌다. 부부에게 도착한 손주의 사진은 부부를 다시 힘내게 하는 영양제 같아 보였다. 부부의 행복한 미소를 뒤로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임실군의 대표적 관광지이나 명소인 임실치즈테마파크를 찾았다. 드넓은 목장과 각종 체험시설, 치즈 생산 공장과 판매점 등이 있는 임실치즈테마파크는 전국에서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나는 토종 치즈의 최초 생산지라는 점도 의미가 큰 곳이다. 치즈테마파크의 여러 시설과 판매시설, 산양 목장을 운영하는 부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멋진 공원과 치즈 숙성과정을 직접 볼 수 있는 전시실도 인상적이었다.


그곳을 둘러보다 한 동상 앞에 서있는 마을 주민을 만났다. 그는 이 마을의 목사님이었고 동상의 주인공은 임실에서 치즈 생산을 최초로 시작한 외국인  지정환 신부님이었다.  두 사람은 기독교와 천주교의 가깝고도 먼 사이의 성직자였지만, 임실군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의기투합해 함께 지역을  위해 일하고 우정을 쌓았다. 지정환 신부는 얼마 전 세상을 떠났지만, 목사는 지정환 신부와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목사님은 여전히 이곳에 남아 지역민들과 함께 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목사님에게 지정환 신부는 누구보다 임실군을 사랑하고 진실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지정환 신부는 1931년 벨기에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디디에 엇세르스테번스로 세레명은 디디에다. 흔히 디디에 신부로 칭한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직자가 되기로 한 직후 6.25 한국전쟁으로 고통받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알고 우리나라에서 사목활동을 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1959년 우리나라에 입국한 지정환 신부는 우리나라에 먼저 들어와 활동하던 신부에게서 한국 이름은 지정환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1961년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성당 신부로 부임한 그는 그곳에서 간척지를 개간해 가난한 농민들에게 삶의 터전을 만들어주었고 1964년 임실군 임실성당 신부로 부임한 이후 임실군 주민들이 가난에 고통받는 모습을 보고 소득을 증진시킬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다 산양 젓으로 치즈 생산을 시작했다. 이후 그는 더 나은 치즈를 만들기 위해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에서 연수하며 기술을 익혔고 이를 바탕으로 1969년 우리나라 최초로 치즈 생산에 성공했다.


이렇게 탄생된 임실치즈는 이후 특급 호텔 등에 납품되며 명성을 얻었고 토종 치즈로 전국적으로 유통됐다. 이후 임실치즈 공장은 지역민들 협동조합 방식으로 운영되기 시작했고 지정환 신부는 그 운영권을 협동조합에 양도했다. 그에게 치즈는 돈과 명성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닌 지역민들이 보다 나은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한 진심 그 자체였다. 이런 그의 진심은 지금도 존경받는 성직자로서 그의 이름이 남도록 했다. 


지정환 신부는 행동하는 양심이기도 했다. 그는 1970년대 후반 유신독재 시절 민주화 운동에 적극 참여해 체포되어 추방될 위기도 있었고 198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에서 이를 지원하기도 했다. 그의 삶은 더 가난하고 소외되고 권력에 의해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삶이었다. 지정환 신부의 이런 마음이 담긴 임실치즈테마파크는 그래서 더 의미 있게 다가왔다. 


이곳에서 새로운 꿈을 키워가는 귀농 부부를 만났다. 부부는 독일식 발효빵과 프랑스 가정식 메뉴가 혼합된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다. 도시생활 속에서 몸과 마음이 지친 부부는 어느 날 귀농을 결정했고 아무 연고도 없는 임실군에 정착했다. 초기에는 귀농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후회도 하고 포기를 생각하기도 했지만, 서로를 격려하며 임실군에서 자리를 잡았다. 지금은 지역에서 나는 밀로 만든 빵과 치즈테마파크에 어울리는 프랑스 가정식 요리를 더해 특색 있는 식당을 운영하는 중이다. 임실군은 이 부부에게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가는 소중한 터전이었다.


한적한 시골길을 걸었다. 작은배 한 척이 보였고 그 배에서 작업을 하는 마을 주민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과거 댐 건설로 수몰된 마을 근처에서 살고 있었다. 옥정호는 섬진강댐 건설로 생겨난 호수로 과거 마을이 있었다. 지역의 발전을 위해 댐이 건설됐지만, 대신 오랜 세월 대를 이어 마을에게 살아온 이들은 고향을 잃고 실향민이 됐다. 이제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마을 주민에게 어린 시절 친구들과 뛰어놀던 장소 등 물속에 잠긴 마을의 모습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는 가끔 배를 타고 지금은 섬이 된 과거 마을 뒷산을 찾곤 한다. 그곳에서 잠시나마 고향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게 작은 위안이 된다고 했다. 그는 마음속에 그의 고향을 품고 살고 있었다. 


임실군의 오래된 주택들이 자리한 마을을 찾았다. 긴 세월 한결같았을 마을 한편에 한 노포가 보였다. 40년이 넘었다는 이 식당에는 처음부터 이 식당을 지킨 어머니와 베트남에서 시집온 며느리가 함께 일하고 이었다. 어머니는 수십 년 내공이 가득한 그의 손맛을 외국에서 온 며느리에게 전수하고 있었다. 며느리는 식당에서 함께 일하며 그 손맛을 상당 부분 익히고 주방 일도 능숙하게 하고 있었다.


흔히, 외국에서 시집온 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이 문화적, 세대적 차이로 인한 고부 갈등을 보여주는 방송이 많지만, 이 고부간은 마치 어머니와 딸 사이처럼 애틋하고 격이 없었다. 어머니는 머나먼 타국으로 시집온 며느리의 고충을 이해하고 사랑으로 며느리를 대하고 며느리는 이런 시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하고 따르면서 집안 분위기에 녹아들었다. 그렇게 고부가 만들어가는 일상은 행복함으로 채워져 있었다. 







초록의 잔디가 인상적인 공원을 찾았다. 그곳에서 축구공 놀이를 하는 강아지 한 마리가 보였다. 그 강아지는 마치 축구 선수들이 드리블을 하든 자기 몸 크기만 한 축구공을 능숙하고 다루며 공원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매우 신기한 장면이었다. 견주에게 이 강아지의 사연을 들을 수 있었다. 견주는 우연히 길거리에서 누군가에 버림받아 유기견이 된 강아지를 발견했다.


그는 그를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바라보는 강아지를 외면하지 못하고 자신의 집으로 데려왔고 가족이 됐다. 이후 강아지에게는 유기견이 아닌 레오라는 이름을 붙여졌다. 그렇게 레오는 거리 생활을 끝내고 자신을 사랑하는 견주의 반려견이 됐다. 견주는 레오를 위해 마당이 있는 집으로 이사를 했고 지극 정성으로 그를 돌봤다. 운동 삼아 공원에서 시작한 축구공 놀이를 하면서 레오의 남다른 재능을 발견했다. 레오는 어느새 축구하는 강아지로 알려졌다. 축구공을 가지고 노는 레오의 모습은 행복함으로 가득했다. 축구는 견주와 레오의 관계를 더 돈독히 하는 촉매제와 같았다. 이런 레오가 오랫동안 행복한 삶을 살기를 기원하며 마지막 장소로 향했다. 


섬진강 변의 마을 길을 걷다가 다슬기 체취 작업을 하는 가족을 만났다. 아버지는 30년 넘게 이 일을 했다. 이제는 배우자와 아들이 그와 함께 일을 하고 있었다. 임실이 고향이 부부는 이 다슬기로 회 무침과 탕, 수제비, 또 다른 다슬기 요리를 곁들인 요리로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다. 청정한 자연을 자랑하는 임실군과 잘 어울리는 한상이었다. 


부부는 한 때 남편의 사업 실패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단칸방에서 4식구가 함께 생활하며 하루하루 걱정 속에 살기도 했다. 남편은 재기를 위해 밤낮으로 일했고 가족은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남편은 남몰래 울음을 삼키며 하루하루를 견뎠다. 이런 남편의 마음을 알면서도 그를 위해 아내는 내색하지 않고 울음을 참고 견뎠다. 그런 시간을 견뎌낸 가족은 다시 행복한 미래를 꿈꾸며 함께 하고 있다. 과거 고생을 웃으며 이야기할 수도 있게 됐다. 비 온 뒤 땅이 더 굳어진다는 말은 이 가족에게 아주 어울려 보였다. 


임실군은 청정자연을 품고 있는 특색 있는 곳이었다. 발전의 속도는 느리지만, 대신 자연과 함께하며 마음의 편안함을 가질 수 있었다. 도시의 편리함과 화려함은 없지만, 임실군에는 행복을 만들고 그 행복을 지키며 살아가는 이웃들이 곳곳에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행복들은 임실군을 따뜻한 봄날의 온기로 채워가고 있었다. 임실군은 늘 봄날 같은 곳이었다. 


사진 : 프로그램, 글 : jihuni74

[벌거벗은 세계사] 최초의 남극점 도달 위한 아문센과 피어리, 세기의 대결

  최근 급속한 지구 온난화에 따른 기후 위기와 관련해 자주 거론되는 지역이 지구의 양 극단에 자리한 남극과 북극이다 . 이 지역은 지구에서 가장 추운 곳이지만 , 지구 온난화의 영향을 가장 먼저 받고 있기도 하다 . 실제 극지의 빙하가 급속히 녹으면...